2025년 한 해의 육아를 돌아보며

December 14, 2025

2025년 2월 25일, 유독 2와 5가 많은 날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어느덧 10개월이 지난 지금, 그동안 부모로서 느낀 점들을 적어보려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미리 밑밥을 깔자면, 이건 제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해서 쓰는 글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니, 그냥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낳는다고 자동으로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법적으로, 지위적으로는 맞습니다. 저는 이 아이의 아버지이고, 이 아이는 저의 자식입니다. 앞으로 평생 바뀔 일 없는 귀속지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빠'로서의 마인드셋이 바로 생기는 건 아니었습니다. 특히 엄마와 달리 아빠는 임신 과정에 간접적으로만 참여하기 때문에, 부성애라는 게 저절로 피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안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만,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도 너무 낯설었습니다. 30년 만에 처음 추가된 가족은, 영화나 소설처럼 보자마자 '울컥'하기보다는 오히려 얼떨떨한 감정을 갖게 했습니다. 키우다 보면 자동으로 아빠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것도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결국 관계라는 건 내가 얼마나 투자하느냐에 따라 깊어지는 것이니까요. 열심히 육아에 참여하고, 아이의 성장에 관여하면서, 이 아이의 '서사'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저도 점점 진짜 '아빠'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육아를 아내에게 일임하거나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았다면, 마음까지 아빠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10개월이 지난 지금은 조금 '아빠'가 된 것 같습니다. 아이도 저를 보며 웃어주고, 제 마음 속에도 아이가 점점 더 커져서 이젠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커져가겠지요.

아이는 내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많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완전 모유수유를 할 것이고, 100일 정도 지나면 분리수면을 시작할 것이고, 조금 크면 카시트에 태워서 근교 나들이도 자주 가고, 아이는 순하고 조용한 스타일일 것이라고요.

그러나 이 모든 기대가 어긋났습니다. 지금 저희는 완전 분유수유를 하고 있고, 아직도 같은 방에서 자고 있습니다. 카시트에만 앉히면 차에서 내릴 때까지 울어서 가급적 차를 안 태우고 있고, 아이는 아주 활동적인 스타일입니다. 처음에는 기대대로 해보려고 책도 읽고 전문가 상담도 받아봤지만 효과는 별로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런 시도들은 아이를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컴퓨터처럼 적절한 입력값을 주면 원하는 출력값이 나올 거라는 생각이요.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건 거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부모님의 기대대로만 크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오늘 이 순간,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가 시스템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인 후로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분유수유 덕분에 저도 밥 먹이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젯밤에도 같이 자면서 애착을 쌓았고, 카시트 대신 안거나 유모차로 함께 산책하는 동네 구경도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활동적인 아이 덕분에 저도 좀 더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고, 그게 좋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아이와 함께 운동도 하고 싶고, 체스도 두고 싶습니다. 셋이 저녁 식탁에 앉아서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싶기도 합니다. 그중 많은 부분은 이뤄질 수도,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예기치 못한 즐거움과 경험이 있을 테니까요. 이런 마음은 연애할 때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내 기대와 다르지만, 서로의 기대에 맞춰가고, 그렇게 변화된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 것. 사랑이란 게 다 그런 형태인가 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호의 속에서 자랐습니다

50여 일 전 어느 새벽의 일입니다. 사실 웬만하면 잘 안 우는 아기였는데, 그날따라 유독 많이 울었습니다. 밥도 주고, 기저귀도 갈고, 옷도 여러 번 갈아입혔지만 그냥 울었습니다. 1시간 가까이 변함없이 우는 아이를 달래다가, 너무 힘들어서 잠시 바닥에 내려두었습니다.

새벽, 아이의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저만 세상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아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경험을 우리 부모님도 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도 새벽에 이유없이 우는 저를 달래느라 힘드셨겠지요. 아무것도 못하고, 마냥 울기만 하는 저를 보며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저를 사랑하셨을까요. 그리고 우리 아이도 언젠가 이 경험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도요. 이 거대한 삶의 순환 속에서 저는 살아가고 있고, 이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전 세대의 호의 덕분이구나. 그렇다면 나도 호의를 전해줘야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아이를 따뜻하게 다시 안아주었습니다.

동화처럼 아이가 안아주자마자 잠들었다,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시간이 지나 울음을 그쳤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이가 힘들게 할 때, 사랑만으로 극복이 안 될 만큼 지칠 때면, 저 스스로를 전 세대의 호의를 전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의무를 행하는 중이라고요. 조금 거창하게 말했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던 이 순환을 온몸으로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마치며

종종 주변 사람들이 이 선택에 대해 물어봅니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상황, 성장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낳아라 낳지 마라 같은 말은 함부로 못 하겠습니다. 제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안 한 선택도 분명 의미는 있었겠지만 그 삶은 조금 뻔했을 것 같습니다.

아이는 이 한 번뿐인 인생을 좀 더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아이를 낳기 전과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었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항상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더 멋진 환경이 주어졌으니, 더 멋진 삶을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이 아이가 있다는 것 자체로 감사합니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이 아이의 서사를 지켜보는 1열의 관객입니다. 언젠가 쇼가 끝나고 아이가 제 삶을 향해 떠나겠지만, 그때까지는 열렬히 응원하며 지켜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