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롭게 시작한 게 몇 개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은 육아고, 그다음으로 큰 것이 체스입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지난 1년 동안 제가 체스를 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체스가 어떻게 제 삶에 들어와 활력소가 됐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서요.
체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인 페이커가 취미로 체스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어떤 매력이 있는지 궁금해서 체스 영상을 조금 찾아봤습니다. 예전에도 행마법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체크메이트의 개념조차 잘 모르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영상들을 보면서 학창시절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체스가 생각보다 훨씬 체계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당연히 그럴 텐데,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체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본격적으로 배워보기로 했습니다.
1-2월: 퍼즐에서 실전으로
일단 퍼즐로 시작했습니다. 체스 퍼즐이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수를 찾는 것인데, 생각보다 꽤 재밌었습니다. 기물에 점수가 있고, 거기에 더해 판세를 고려해 흑과 백의 유리함이 숫자로 정해집니다. 그 유리함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수를 찾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잘못된 수 하나로 완전히 이기던 게임도 한순간에 불리해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퍼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실전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컴퓨터와 몇 번 두고 나서,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서 체스 닷컴의 레이팅을 돌려봤습니다. 첫 레이팅은 555였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꽤 낮은 레이팅이었죠.
목표를 1000으로 잡고 꽤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퍼즐을 꽤 풀어서 전술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오프닝이 부족하니 애초에 전술각을 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아는 오프닝이 없어서 주로 스콜라 메이트를 노리는 웨이워드 퀸 어택을 사용했는데, 상대가 당연히 안 당해주니 항상 불리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프닝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슥슥이의 이탈리안 게임 강의를 보고 백으로 시작할 때는 이탈리안 게임을 두는 패턴을 익혔습니다. 그렇게 2달 동안 열심히 한 끝에 레이팅 1000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는 대응이 나오면 당황했고, 특히 흑으로 시작하면 항상 불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3-5월: 육아와 체스의 병행
그러다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너무 당연하게도, 체스를 둘 시간이 사라졌습니다. 특히 10분짜리 래피드 경기는 정말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이가 잘 때 해보려고 했으나, 갑자기 울거나 해서 기권패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가 오히려 저에게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실전을 둘 수 없으니 주로 퍼즐을 풀거나 영상을 많이 봤습니다. 이 시기에 퍼즐 레이팅은 체스닷컴 2500(개편 전 기준)을 찍었고, 히카루 나카무라나 다니엘 나로딧스키의 스피드런 강의를 보면서 GM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플레이하는지 배우려고 했습니다. 책도 사서 읽었는데, 별로 그렇게 와닿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도움이 됐습니다.
다만 대국 수는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사실 이건 시간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레이팅을 잃는 것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승부욕이 강한 편이라 레이팅이 떨어지면 복구하려다 감정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플레이하기 일쑤였는데, 육아를 하면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이팅전은 정말 신중하게 뒀습니다. 이전에는 하루에 10판 넘게 두던 날도 있었는데, 이때는 최대 2~3판 정도만 뒀습니다. 퍼즐로 어느 정도 실력을 쌓고 나서 차근차근 대국을 늘려갔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시간 관리였습니다. 퍼즐은 하루 종일 생각할 수 있지만, 래피드는 그럴 수 없으니 시간패를 정말 많이 당했습니다.
6-8월: 시간 관리 훈련
시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체스닷컴 레이팅을 더 떨어뜨리고 싶지 않아서 리체스에서 새로 시작했고, 아예 블리츠(5분)를 두기로 했습니다. 레이팅에 덜 집착하려고 플랫폼을 바꾼 것이었는데, 블리츠는 시간 관리 훈련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시간패를 많이 당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집중해야 하는 순간과 직관을 믿고 빠르게 둬야 하는 순간을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니 시간패가 나던 게임들은 불필요한 후보수들 사이에서 너무 고민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체스에서 레이팅이 점점 오르면서 이번에는 리체스 레이팅에 집착하게 됐습니다. 레이팅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플랫폼을 바꿨는데, 결국 같은 문제로 돌아온 것이죠. 그래서 리체스에서 수련하고 체스닷컴으로 돌아가려던 계획도 흐지부지됐습니다. 그래도 리체스에서 블리츠를 둔 경험은 시간 관리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9월~현재: 일상이 된 체스
아이가 크면서 빈 시간에는 아이와의 상호작용에 집중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체스에 쏟는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체스를 빡세게 두던 초반에 비하면 열정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체스를 사랑하는 마음 자체는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체스가 제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전히 시간이 나면 체스 유튜브를 보거나 퍼즐을 풀지만, 예전처럼 실력을 올려야겠다는 강박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느는 부분이 있을 거고,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다시 집중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너무 집착해서 번아웃이 오는 건 피하고 싶습니다.
이 시기에는 오프라인 체스 모임에도 나가봤습니다. 확실히 손으로 기물을 움직이는 맛이 있었고, 체스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체스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재밌었습니다. 아이 때문에 자주는 못 나가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나가볼 만한 것 같습니다. 모임 다녀온 후 오랜만에 체스닷컴 레이팅을 돌려봤는데, 1200을 찍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600점이 오른 셈이니 나름 의미 있는 수치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주로 Maia와 체스를 두고 있습니다. Maia는 인간과 닮은 수를 두는 AI인데, 제 수준에 딱 맞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정도라 집중하지 않으면 지기 때문에 긴장감도 있고, 컴퓨터라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것도 좋습니다. 이 시기에 물리적으로 체스를 둘 수 있는 e보드인 Chessnut Go도 샀는데, Maia와 둘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스러운 소비였습니다.
레이팅만 보면 그렇게 뛰어난 수준은 아니지만, 굳이 집착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전히 레이팅전에서 지는 건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승률이 높은 편이라 몇 번 더 두면 더 오를 것 같긴 하지만, 서두르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레이팅에 좀 더 무뎌지거나, 지금보다 훨씬 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12월 마지막 일요일에는 동네에서 열리는 초급자용 체스 대회에 나갑니다. 지난 1년을 마무리하는 느낌이라 기대가 됩니다.
체스가 내게 준 것
체스를 두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드와 나만 존재하고, 다른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어릴 때부터 (잘하든 못하든) 머리 쓰는 걸 꽤 좋아하는 편인데, AI 시대에 요즘 진짜로 머리를 쓰는 순간은 체스를 둘 때 정도인 것 같습니다. 생각의 많은 부분을 AI에 위임하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지금처럼 꾸준히 두고 싶습니다. 오래가는 취미가 될 수 있도록 퍼즐도 열심히 풀고, 특히 흑으로 d4를 상대할 오프닝을 하나 더 익혀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는 잉글런드 갬빗밖에 없어서 선택지가 부족하거든요.
장기적으로는 레이팅전에 대한 스트레스도 해결하고 싶습니다. 진짜 내 레이팅이 어느 수준인지 파악하려면 어쨌든 레이팅을 둬야 하고, 높은 수준의 상대를 만나야 점점 실력이 강해질 테니까요.
그리고 누구든 체스를 두는 좋은 친구를 한 명 사귀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지치지도, 사랑이 식지도 않으면서 오래오래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되길 바랍니다.